【제64회 청주시의회(정례회)】
2021. 6. 21.
[5분 자유발언]
도장골 청주형무소 민간인 희생자의 원혼을 달래 주십시오.
도시건설위원회 박완희 의원
도시건설위원회 박완희 의원입니다.
발언의 기회를 주신 최충진 의장님과 동료의원 여러분, 한범덕 시장님과 관계 공무원 여러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만리전장 외로운 몸 부모 형제 이별하고 홀로 섯는 나무 밑에 힘이 없이 쓰러져! 나의 사랑 조선 혁명 피를 많이 먹으려나. 피를 많이 먹겠거든 나의 피도 먹어라” |
22살 꽃다운 나이에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해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독립투쟁에 나섰던 홍가륵 1) 선생께서 즐겨 불렀던 노랫말입니다. 안타깝게도 홍가륵 선생은 그토록 원하던 독립된 대한민국, 청주에서 억울하게 학살당하셨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한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대한민국 군경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을 집단학살했다. 청주형무소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0년 7월 2일부터 충북지구CIC의 지휘 아래 제2사단 16연대 헌병대와 기동대를 중심으로 한 충북도경찰국과 청주경찰서 경찰 등은 청주형무소 전체 재소자 중 절반 이상인 800명의 정치범을 청주시 낭성면 도장골, 남일면 분터골, 남이면 화당리, 가덕면 공원묘지로 끌고 가 총살했다.” |
박만순의 기억전쟁에 따르면 이는 ‘북한군이 남하하면 빨갱이(형무소 재소자 2))들이 인민군에 협력할 것'이라는 막연한 추정에 의한 예방학살이었다고 합니다.
2009년 국가보훈처는 홍가륵 선생의 공적을 인정해 독립유공자에게 수여하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으며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홍가륵 선생이 이승만 정부하에 자행된 민간인 학살의 희생자라고 공식 인정하였습니다. 또한 선생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주시 낭성면 호정리 도장골 지역에 대한 유해발굴을 권고했습니다. (1950년 학살 당시 생존자 증언)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유해발굴 조사도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2019년 3월 이곳에서 진행된 벌채공사와 사방댐 건설로 유해 매장지가 집단 훼손되었습니다.
낭성면 도장골은 청주형무소에 있던 재소자, 보도연맹원 등 약 170여명이 1950년 7월 8~9일 사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학살당한 곳입니다.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과 청원군수 명의로 안내판을 세워 청주형무소 사건의 민간인 집단 희생지이므로 함부로 훼손하지 말 것을 경고한 곳입니다. 청주시는 매년 안내판이 잘 관리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여 행정안전부에 보고를 해왔습니다.
청주형무소 평화유족회(회장 홍우영)는 진실화해위원회 권고에 따라 유해발굴이 진행될 것이라고 믿고 십여 년을 기다려 왔습니다. 일 년에 한 두번씩 찾아가 제를 올렸는데 2019년 4월에 현장을 가 보니 벌채공사와 사방댐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고 합니다. 충북도와 청주시에 공사를 중단하고 유해발굴을 요청하였으나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으며, 유족들은 공사중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냈지만 판결은 공사 종료 후에나 내려졌다고 합니다. 유족들은 패소하였고, 청주시는 재판비용까지 유족들에게 청구하였다고 합니다. 유족들은 너무 억울하다고 울분을 토하고 계십니다.
6.25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등은 청주시 자치행정과에서 진행합니다. 사방댐은 충북도 산림환경연구소에서 진행하고 벌목은 청주시 산림과에서 인허가 업무를 진행합니다. 아무리 시급한 재난안전 사업이라 할지라도 사업대상지가 어떤 곳인지는 파악하고 공사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부서간, 기관간에 업무협조가 이렇게 안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에 다음과 같이 요청드립니다.
1. 청주시와 충청북도는 법적 판단을 떠나 도장골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 합니다. 수십년 간 영문도 모른 채 부모와 가족을 잃고 핍박과 설움으로 살아온 유족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2. 민간인 희생자 묘소라고 추정되어 국가기록원에까지 사진으로 보관되어 있으며 유족들도 제를 지냈던 작은 봉분 3곳에 대한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여 복원해야 합니다.
3. 청주시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에 따라 억울하게 돌아가신 도장골 희생자분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위령사업을 추진해 주십시오.
4. 청주시에 존재하는 6.25 민간인 희생지에 대한 전수조사를 통해 근본적인 보전방안(도시계획시설 지정 등)을 수립해 주십시오.
역사를 잊은 민족의 미래는 없습니다.
올해로 한국전쟁 71주년을 맞이합니다. 호국영령들에 대한 추모와 더불어 이제는 억울하게 희생당한 우리 이웃들을 살펴야 합니다. 민족의 뼈아픈 과거사를 진실과 화해로 치유하는 첫걸음은 당사자들인 유족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5분 자유발언을 마치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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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가륵은 1913년 10월 19일 경기도 수원군 음덕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1927년 배재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배재고보 시절 내내,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교장 사택에서 심부름을 하는 등 고학으로 학교를 다녔다. 그는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1933년 봉천을 경유해, 상해로 갔다. 이곳에서 김원봉을 면접하고, 의열단에 가입한 후 조선혁명간부학교에 2기생으로 입교했다. 2기생들은 정치교육, 정신교육, 군사교육을 받았는데, 군사교육의 역점은 법령·군사지식·정보·폭파·전술 등 각종 군사기능 숙련에 있었다. 홍가륵을 포함한 2기생 53명은 6개월간의 교육을 받고 1934년 4월 20일 졸업식을 가졌다. 홍가륵은 교장 김원봉과 교관 윤세주로부터 2기생의 선발대로서 조선에 침투하여 공작 활동을 수행할 것을 명령받았다. 그는 국내로 들어와 곧바로 군사 활동 수행을 기도한 것이 아니라 대중운동을 활성화하고, 결정적 시기에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군사공격을 하려 했다. 하지만 먼저 검거된 동료의 자백에 의해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고,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이상일, <수원출신 항일청년투사 홍가륵>)
2) 1950년 6.25 전쟁 직전에 청주시 탑동 소재 청주형무소에는 정원이 500명이었으나 1,800명의 재소자가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800명이 정치사상양심수였다. 그들 가운데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홍가륵, 농촌운동가 신상인, 청주농고 교사 임영재, 청주사범학교 학생 박종한, 논산면 공무원 이재명, 그 밖에도 제천면장, 청주시청과 도청 공무원, 정평에서 활동한 노동운동가 등 소자산층이 많았다.(청주 형무소 평화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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